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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산책 ( 15 ) - 김진흥 자문위원

2012-10-05 16:03:01
관리자

클래식 음악 산책 ( 15 )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 드보르작과 말러      

                                                                                       - 김진흥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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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어는 현재 체코의 서부지역을 가리킨다. 원래 보헤미어 사람들은 대단히 예술을 사랑하는 민족이며 오늘날 까지도 보헤미안이라고 하면 예술가의 대명사로 통하기도 한다.

 드보르작은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보헤미어에서 태어난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말러 또한 보헤미어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곡이자 지휘자이다.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지휘자로 잘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중요한 후기 낭만파 작곡가로 인식 되었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이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의 음악 사조를 말한다.


 그러면 이들 후기 낭만파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인 그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하여 살펴 볼까 한다.


  안토닌 드보르작 (Antonin Dvorak; 1841 9 ~ 1904, 5)은 체코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 근교에서 태어났다. 드보르작은 푸줏간 겸 여관업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 받기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어릴적부터 바이올린 만 켰다고 한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연주자로 생활하면서 음악이론을 배운 그는 16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를 했다. “카렐 코므자크악단의 비올라 연주자로 첫발을 내 디딘 그는 이 악단이 프라하가극장 소속 오케스트라에 통합된 후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1824,3 ~1884,5)가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연주와 작곡 생활을 본격적으로 병행하기 시작 하였다. 1878 37세 때 작곡한 <슬라브 무곡>등이 대 성공을 거두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40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작곡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891 50세 때 차이코프스키 (1840,5 ~ 1893,11)의 초대로 러시아를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에 피선 되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훈장도 받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지휘자로서도 명망을 얻은 드보르작은 1891년 뉴욕 국립음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1895년 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그 당시에 작곡한 곡이 바로 유명한 교향곡 <신세계로 부터>와 현악 4중주곡인 <아메리카>이다. 그후 프라하로 돌아온 그는 음악원 교수로 다시 되돌아가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첼로협주곡 등을 작곡했고 만년에는 오페라에 전념하여 <루살카> <아르미다>등을 작곡했다. 60세 때에는 프라하 음악원장과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고 이때 예술,과학명예훈장도 받았다.


  그는 1904 63세에 세상을 떠나기 까지 200여곡이 넘는 그의 작품은 체코 민속음악 형식이 가미된 이성주의와 후기 낭만주의의 표현력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드보르작은 브람스를 좋아했고 그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특히 고전적인 균형과 조화가 잡힌 구성의 틀 안에서 민족적인 주제나 리듬이 융합되어 있다.



  그러면 드보르작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살펴 볼까한다. 그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로 그가 작곡한 완성곡만도 206편에 달한다. 9곡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8> <9 (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작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5편의 교향시와 현악4중주곡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32곡의 실내악을 남김으로써 19세기 후반에 브람스에서 이어지는 실내악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관현악 작품으로 <슬라브 무곡> 1집과 제2집 등 20여편에 가까운 곡을 남기고 있다. 오페라로는 <루살카> <아르미다>등을 작곡 했다. 협주곡 분야에는 피아노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 그리고 유명한 첼로협주곡 등 7편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피아노곡으로는  <8개의 유모레스크>를 비롯하여 10여편을 작곡했다. 성악곡 분야에도 미사곡, 레퀴엠 등이 있고 합창곡도 작곡하였으며 그리고 유명한 <집시의 노래> <황혼의 노래> 등 수십편의 예술성이  높은 가곡을 남겼다.



  그러면 드보르작 하면 떠오르는 <신세계로 부터>교향곡에 대하여 한번 깊이 분석하여 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드보르작은 1892년부터 뉴욕에 머물던 시절, 미국에서 들은 흑인 음악이나 아메리칸 민요에서 암시받아 이 곡의 스케치를 썼다고 한다.

1악장은 신 대륙의 새벽을 연상케 하는 마디가 길고 유연한 소나타 형식으로 연주된다. 소박하고 힘찬 제1주제가 전개된 뒤에 플릇과 오보에로 나타나는 제2주제는 미국인 사이에 애창되는 흑인 영가에서 유래되었다. 2악장은 전 악장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인데,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하는 주요 주제는 신 대륙 전원시의 한 토막이다. 애수 띤 선율로 노래하는데 조국을 멀리 떠난 이들의 애끓는 향수 같은 것으로 드보르작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3악장은 약동하는 현악기의 리듬, 높이 울리는 팀파니 등은 보헤미아 농민들의 거친 민속 무용을 생각케 하는 장면이다.. 4악장은 전체적으로 힘차고 격렬한 악장으로 전개부는 웅대한 제1주제를 기둥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밖에 제1, 2, 3악장의 주요 주제가 차례로 등장한다. 이것은 전 악장을 튼튼하게 결부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다음,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1860, 7 ~ 1911, 5 ;오스트리아)의 생애와 작품에 대하여 살펴 볼까한다. 작곡가 겸 지휘자 말러는 지난 2011년이 그의 서거 100주년이 되던 해로서 그를 기념하는 공연들이 풍성하게 열리고 관련된 음반과 책도 속속 출시되곤 하였다 말러리어에 걸린다고 할 만큼 그의 음악은 중독성이 강한 특징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얻었지만 작곡가로서의 좌절을 반복하면서 생애를 통해서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같다.. 말러는 1860년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헤미아의 칼슈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양친 모두 유태인이다  5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시작해서 10세 때에는 연주회도 열었다고 한다. 1875 15세가 된 그는 빈의 음악원에 입학했다. 빈의 음악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도 졸업한 말러는 졸업 후에도 빈에 남아 개인 레슨과 편곡을 하면서 생활을 했다. 1880 20세 때부터 조그마한 휴양지 할의 극장에서 여름 시즌 동안 지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는 지휘자로 근무하면서 휴가 때는 작곡 활동을 했다 .또한 말러는 유고슬라비아, 슬로바키아, 프라하, 라이프치히 등을 돌아 다니면서 지휘자로 일했다.. 이 사이에 완성한 것이 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1교향곡>이다. 1888 28세 때에는 10년 계약으로 부다페스트 왕립가극장으로 옮겼지만 극장과 충돌해서 2년만에 함부르크 시립가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짝 마르고 항상 해슥한 얼굴의 말러는 지휘자로서는 훌륭했지만 악단원이나 가수 그리고 극장 운영자들에 대한 요구는 상당히 많고 까다로웠고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던 같다. 말러는 그 자신이 격분하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는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확실히 높았다. 특히 말러 자신이 경애하는 바그너(wagner; 1818 ~ 1883; 독일)곡의 지휘는 명연주로 꼽힌다. 부다페스트에서의 <라인의 황금> <발퀴레>의 연주, 객연으로 런던에서의 <니벨룽겐의 반지>전곡 연주 등이 그것이다. 그 후 1891 31세 때부터 1897년 까지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지휘자를 맡게 되었다.


  1894
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피서지 벨터호반에서 2개의 교향곡과 가곡집 <어린이의 신기한 피리>가 완성되었다. 브람스 (Brahms; 1833 ~1897; )도 말러가 쓴 음악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지휘자로서의 솜씨는 높게 평가했다. 브람스는 말러를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로 추천했다. 1897년부터 10년간 여기서 수 많은 명연주를 했다. 또한 이 기간에 교향곡 <4>부터 <8> 까지를 완성하고 가곡에서도 명작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등을 작곡했다. 1902 42세 때 유명한 풍경화가의 딸로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난 19세 년하 알마 신트라와 결혼했지만 그들 사이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던 같으며 1907년 사랑하는 다섯살 짜리 딸 마리아가 병으로 급사한 충격은 그에게 심장병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극장측이나 관객과의 다툼도 심하였고 연달아 일어나는 불행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을 사임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가극장과 계약,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어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 사이에도 작곡활동은 계속되었지만 심장병을 앓는 말러는 몸이 점점 나빠졌다. 1910 9월 뮌헨에서 직접 지휘란 그의 작품 <8교향곡>의 첫 공연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야 작곡가로서 성공한 셈이다. 1911 2월 편도선염으로 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지휘대에 섰다. 이것이 그의 생애 최후의 연주가 되었다. 몸은 점점 악화되어 그해 5 51세 나이에 빈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죽을 당시 그는 나는 휴지조각과 같은 인생이었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말러의 주요 작품으로  9개의 완성된 교향곡이 있으며 특히 교향곡 <4> <5> <8> 등이 유명하다. 연가곡으로 <방황하는 젊으이의 노래>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 등이 많이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교향곡과 연가곡의 두 성격을 띠는 <대지의 노래>가 또한 유명하다. 그의 가곡은 물론 피아노 반주의 악보도 있는데 그의 경우 오케스트라를 반주로 해서 가곡이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말러는 교향곡 속에도 소리를 넣은 것이 많고 제2, 3, 4, 8번의 교향곡에 독창과 혼성합창이 들어 있다. 그의 작품 중 특색있는 <교향곡 제8>에 대하여 잠시 살펴 볼까한다. 1906년에 완성된 이 교향곡은 음악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규모 관현악 편성과 수 많은 합창단원으로 구성된 교향곡으로 천인 교향곡이란 부제가 붙게 되었다. 실제로 1910 9 12일에 직접 지휘한 뮌헨 초연에서 합창단 850, 독창자 8, 오케스트라 연주자 171명 등 1,0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엄청난 규모로 인하여 이 작품은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거창하고 기념비적인 대작이라 할수 있다. ()